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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명한 하늘, 단풍의 빛깔, 강렬한 햇살과 선선한 그늘, 상쾌한 바람과 공기... 가을에는 유독 자연이 눈에 들어온다. 오감이 어느 계절보다 활발하게 작용하고 아름다움에 대한 생각과 조형적 감각이 예민하게 반응하는 시기이다. 가을의 기억과 경험은 자연의 점진적인 변화를 기대하게 만들며, 시각은 심상을 풍부하게 만들고 감성을 자극한다. 익숙한 계절의 변화가 왜 여전히 아름다울 수 있을까. 자연의 순환적 질서는 작은 변화와 차이를 가시화하여 우리의 몸과 마음을 감응시키기 때문이다. 시각은 이렇게 단순한 감각의 차원을 넘어 다른 세상, 시공간에 대한 인식의 차원을 열어줄 수 있다. 

시각은 빛과 함께 존재한다. 빛은 색채와 형태를 발견하고 시공간을 경험하게 만드는 가장 본질적 요소이다. 지선경 작가는 다양한 매개체를 통해 투영되는 빛의 이미지를 심미적으로 응시하고 포착하여, 조형적 색채와 형태를 입히고 양감을 만든다. 빛과 그림자는 조형적 착상의 출발 지점이다. 양면성을 지닌 채 공존하는 이 두 가지의 비물질적 요소는 물질적 대상의 존재와 부재를 정의한다. 이로 인해 양화(positive)와 음화(negative)의 이미지가 동시에 발생한다. 작가에게 빛은 양가적인 가치와 개념을 극명하게 노출시키는 요소가 되기도 하고, 어둠과 밝음, 존재와 부재, 음과 양, 물질과 비물질, 중력과 무중력, 투명과 불투명과 같은 양가적 가치 사이에 존재하는 무한하고 다양한 스펙트럼을 밝혀준다. 빛과 어둠은 상대적 시선으로 미세한 차이를 드러낼 수 있는 영감의 원천으로 작용하며, 작고 보잘것없던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명백한 의미를 지닌 것들에 모호함을 덧대기도 한다.

한편, 그림자는 역으로 빛과 대상을 주목하게 만든다. 빛-사물-그림자의 위상을 통해 그림자의 형성 조건과 배경이 되는 물리적인 시공간을 상정할 수 있다. 채워진 형상과 빈 여백의 공간은 또 다른 조형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작가는 비움과 채움 간극 사이에서 상대적인 가치가 발생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들어 낸다. 빛과 그림자가 만들어낸 이미지는 사물이 지닌 고유한 가치와 속성이 제거된 순수한 추상적 표상이 된다. 물질적인 대상을 떠나 비물질적인 조형요소로 포착된 색채와 형태는 추상적 구성요소로 유기적인 구성과 연계의 지점을 찾아 나간다.

색채는 형태로 드러나고 형태는 색을 구분한다. 형태와 색채는 여러 관계를 통해 시각적으로 작용한다. 확장과 수축, 전진과 후퇴, 상승과 하강, 상하좌우의 방향성은 형태와 색채의 관계에 의해 조형적으로 증감된다. 선의 모양과 굵기, 길이, 그리고 선이 시작되는 점과 나아가는 각도, 선의 개수와 연속성, 더불어 선에 적용된 색채, 이 모든 조건들은 선의 조형성을 다양하게 변주할 수 있는 변수가 된다. 색채는 각각의 모든 형태가 지닌 조형성을 극대화한다. 스프레이 분사 기법으로 얇게 뿌려진 색채는 대기의 움직임이 가미되어 가볍고 경쾌하며 독자적으로 발광한다. 또한 색채의 단계적 변화(gradation)는 물감의 표면층과 질감을 자연스럽게 밀착시켜 색의 대비와 채도의 충돌을 완화한다. 

색채와 형태의 조율은 다양한 물성의 재료와 수집된 오브제와 결합되어 한층 더 구체화된다. 투과되고 반사하는 빛의 정도에 따라 여러 차원의 층위에서 다채로운 색채와 동적인 형태가 만나 조절되고 반응한다. 벽면(바닥), 종이, 나무, 끈, 아크릴, 유리, 파이프, (타공)철판, 거울은 투영되는 빛의 정도를 달리하며 다각도의 입체적 공간감을 형성한다. 각각의 재료가 지닌 고유의 질감, 투과율, 반사율, 경도와 탄성의 차이는 빛을 이용한 새로운 시각적 효과를 연출한다. 거울을 통한 다른 시공간의 반사, 뿌연 레이어의 장막, 색유리, 조명의 색온도, 프레임의 효과는 다양한 시각 환경을 열어주며 능동적인 시점의 변화를 유도한다. 물질과 비물질적 요소가 혼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선의 중심은 색채와 형태가 조응하는 추상적 조형성을 향하고 있다. 사각 평면의 조형적 요소를 주목하던 우리의 눈은, 평면(바닥 또는 벽면)이 배경이 된 공간 속 입체 구조물을 다면적으로 이동하며 바라보게 된다. 다양한 시선의 높이와 각도로 공간을 가로지르며 떠다니는 색채와 형태들은 물리적인 공간과 회화적 공간을 넘나든다. 이차원과 삼차원의 경계, 빛과 어둠의 경계는 더 이상 무의미하다.

 

이번 전시에서 형태와 색채는 각기 하나의 표현이자 상호작용하는 시각 언어이다. 모든 형태는 평면과 평면 사이를 구분하며, 추상적인 본질에 다가갈 수 있는 자유로움을 부여한다. 또한 조형적 요소는 주변과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 생성되고 존재하며 상호 영향을 미치고 계속 변화하고 있다. 이제 우리의 눈은 움직임을 발생시키는 감각을 뒤쫓는다. 같은 모양과 크기의 반복,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와 질서, 위치, 방향. 간격, 모든 요소의 중첩과 반복은 패턴을 형성하며 조형적 율동감을 환기시킨다. 조화로운 균형의 상태뿐만 아니라 상충되는 요소들의 불협화음과 단절,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도 역동적인 움직임은 발생한다. ‘움직이는 시선’은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행위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창의적인 행위이다. 상호 독립적이면서도 전체적으로 유기적인 조화를 이루도록 모든 조형적 요소들은 종합되고 구성되었다. 작가의 조형적 원리에 따라 우리의 눈은 단일 요소들을 주시함과 동시에 주변을 통합하여 관계를 규정하고, 일관된 하나로 전체를 파악하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시각은 시공간적 경험이며, 자연의 빛은 시공간을 역동적이고 가변적으로 변화시키는 요소이다. 이로 인해 시각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색채와 형태를 포착할 수 있고, 시공간의 생성과 소멸을 경험하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펼칠 수 있다. 각기 다른 시각 언어로 구사된 각양각색의 이야기들은 사실 시각 환경(삶의 진리, 자연의 질서)의 한 측면일 뿐이다. 시각 예술가들은 작업을 통해 삶을 매개하는 역할과 기능을 수행할 수밖에 없으며, 스스로의 삶의 태도와 사고가 작업의 내용과 방식을 결정지을 수밖에 없음을 인식하고 있다. 한편, 감상자는 예술작품을 통해 스스로 보지 못하는 것, 느끼지 못하는 것, 상상하지 못하는 것,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 결국 나에게 없는 내가 몰랐던 감각을 예술작품에서 발견하고 고양시키며 감동한다. 시각예술은 결코 시각의 영역에만 한정할 수 없다. 이미지로 구현된 시각예술은 시공간의 질서를 새롭게 규정하는 일이다. 조형적 질서는 작가가 세상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시각 언어가 되며, 조화롭게 순환되는 자연의 질서와 조형예술의 본질이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새로운 질서에 내재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일은, 예술적 창작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충분히 온당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모순의 구멍 넓히기

권혁규 ( MUSEUMHEAD 큐레이터 )

 

질식하듯 범람하는 이미지들 사이에서 탈-이미지 시대의 징후를 감각하는 건 아이러니한 일이다. 이미지를 마주하며 인간은 실제를 감각한다고, 심지어는 결정한다고 착각한다. 한 장의 사진을 손에 넣는 행위와 현재의 수집, 전유의 욕망을 연결하는 오늘 sns 등, 이미지 중심의 각종 온라인 매체는 이러한 착각을, 또 그것의 소비주의적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곤 한다. 누군가는 여기서 식민화된 소비 영역으로 전환된 이미지를 말할지도, 제대로 작동할 수 없는 박탈된 이미지의 현주소를 진단할지도 모른다. 분명 우리는 이미지에 무감각해지고 있다. 제 아무리 강한 호소와 메시지를 갖는 이미지도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고 스쳐 지나가기 일쑤다. 전쟁과 재난, 고통의 이미지가 무기력하게 소비되는 오늘 이미지가 분열된 세계와 다시 접촉하고 설득력을 갖는, 나아가 그만의 위대함을 획득하는 장면을 꿈처럼 아득히 그려보기도 한다.   

 

테미예술창작센터에서 열린 지선경 개인전 《Drunkard’s Move: 술고래의 행보》는 이미지의 욕망을 잠시 중단하려는 듯 보인다. 여기서 중단은 앞서 설명한 상실과 불가능성을 일정 부분 인정하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전시에서 ‘중단’은 그 제목처럼 무언가의 ‘행보’, ‘이동’과 함께한다. 걷기는 시간과 공간을 가로지르고 감각하며 외부와 끊임없이 결합하는, 신체와 감각, 정서를 움직이는 행위이기도 하다. 그래서 걷기, 이동하기는 신체적, 감각적 구분이 확정적 실체가 아니라 조건에 따라, 주변 환경에 따라 가변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임을 느끼게 한다. 분명한 물질과 윤곽에도 불구하고 장소와 시간, 감각의 이동은 새로운 접속과 충돌, 분리와 합체를 만들며 특정 대상을 의문에 부치기도, 또 다른 맥락으로 재/탄생시키기도 한다. 이 과정은 많은 경우 이미지의 인지와 연동된다. 이동하는 과정 속 이미지는 이질적이고 적대적인 것과의 결합을, 변화의 향상성을 감각하는 세계의 편린을 마주하게 한다. 

‘중단의 이동’은 그 자체로 모순되지만 작가는 이 불합리함을 최대한 멀리 던져보며 그 경계에서 다양한 사고를 발동시킨다. 그것은 하나의 이미지가 사회적 산물임을, 다시 말해 생산되고 활용되는, 금지하고 허용하는, 지배하고 공격당하는 등의 서로 다른 행동의 장이자 토대임을 인지하는 것이다. 다시, 전시는 ‘이동’의 개념과 함께 이 복잡한 이미지의 사유와 행동을 특정 시공과 헤게모니에 정박시키지 않고 활성화하길 의도한다. 총 세 부분으로 나눠진 《Drunkard’s Move: 술고래의 행보》의 첫 번째 파트라 할 수 있는, 전시장 A에 설치된 <Cromatopia/크로마토피아>(2023)는 마치 이미지화할 수 없는 시공의 경험과 흔적, 혹은 예감처럼 다가온다. 경험의 예감, 사태의 흔적이라는 말은 얼핏 잘못된 프로그램 언어처럼 보이지만 작업은 분명 이미지의 표피성과 명확성을 이탈한 일종의 신경세포처럼 또 해체된 기계장치처럼 등장한다. 작가는 “다양한 도시에서 작업하다 남은 종잇조각을 활용해 운동성이 강조된 하나의 장면을” 만든다. 주로 “색의 배열을 통해 관련 없는 요소들 사이에 관계를 만들어 형태를” 구성하는데 이 프로세스에서 유독 눈에 띄는 건 다름 아닌 ‘절단’, ‘채색’, 그리고 ‘연결’의 방법이다. 전시실 A.1의 긴 벽면에 설치된 <Cromatopia/크로마토피아>는 각기 다른 모양과 크기, 색이 연결되어 표류하는 모습이다. 여기서 각각의 조각들은 혹은 잔여물들은 말 그대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원본과 복제품의 개념에서 벗어난 어떤 상태로 나름의 이동과 궤적을 형상화해 보인다. 작업을 가로지르는 절단, 채색, 그리고 연결의 방법론은 정형화된 이미지와 물질을 거부하며 충분히 시각화되지 못한, 하지만 기존 이미지의 시각성을, 그 한계를 초과하는 듯한 상태를 구현한다. 물론 이는 특정 경험을 지시하거나 상징하지 않으며 여러 시공을 경유한 복합체의 임무를 강요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작업은 이미지를 통해 무언가를 연상하고 기억하는 일반적인 인식을, 그 작동을 넘어서는 종합의 프로세스를 실험하려는 것은 아닌지 유추하게 한다. 

이미지의 고유한 작동에 대한 작가의 의구심은 전시장 A.2에 설치된 <Emotionsphere/감정권>(2023)에서 조금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작가는 “사람의 다양한 표정도 다원적인 이미지로 해석될 수 있지 않을까?”란 질문과 함께 어린 조카에게 사람의 표정을 그려달라고 부탁한다. 이후 캐릭터처럼 그려진 사람의 표정을 영상으로 옮겨 얇은 천위에 프로젝팅하거나 마치 하수구 커버나 맨홀뚜껑처럼 도심 곳곳에서 볼법한 사물들에 조합해 전시한다. 표정은 인간의 상태를 파악할 수 있는 일종의 입자와도 같다. 하지만 그것은 도시를 걷는 것처럼 시시각각 변화하며 때로는 무색무취의 상태로 존재한다. 전시장 A.2의 표정들은 무언가의 심적 표상이나 시각적 영사로 다가오기보다 작가의 말처럼 “곰살맞은 나풀거림”으로 존재할 뿐이다. 여기서 이미지는 고정된 것이 아닌 희미한 움직임으로 마치 냄새, 소리, 빛처럼 정해진 대상을 벗어난 상태로 퍼져나간다. <Cromatopia/크로마토피아>가 절단, 채색, 연결의 방식으로 네모난 프레임의 이미지, 그것의 규정성을 거부한다면 <Emotionsphere/감정권>은 얼핏 분명해 보이는 표정, 캐릭터를 알 수 없는 경계와 이동 속에 흔들리는 작은 우주처럼 제시한다. 분명한 시작도 끝도 없이 작은 바람에도 그 모습을 바꾸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표정이 떠오르고 또 사라지는 상황은 고정되지 않은 이미지의 세계관을 계속 드러내 보인다.

 

전시장 B에 설치된 <Flowscapes/흐름의 풍경들>(2023)은 캐릭터/이미지의 명시성을 대체하는 이미지의 환상을 확장시키려는 시도로 다가온다. 지선경은 이 과정에서 흔히 말하는 기호와 그래픽의 작동을 유심히 바라보고, 또 비켜선다. 어떤 기호, 대상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의미체계에 속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의미체계는 분명한 기호의 명시성뿐 아니라 비기호의 명시성까지 포함한다. 일례로 흔히 말하는 추상화는 그것의 붓질과 색, 소위 말하는 분위기로 특정 정서와 감각을 전달한다. 우리의 모든 직관과 감정은 (추상을 포함한 거의 모든) 현상의 표상과 깊게 관계 맺는다. 인간이 감각하는 것은 어쩌면 본질이 아닌 나타난 현상일 뿐일지도 모른다. 주변의 현상을 지워버린다면 시공간의 인지마저도 나아가 시공간의 개념마저도 사라져 버리는 상황을 마주할 수도 있다. 현상이 사라진 혹은 무의미해진 공간에서 인간은 무엇을 감각하게 될까. <Flowscapes/흐름의 풍경들>은 이러한 질문을 한편에 품고 낯익은 표지판과 기호들이 변형시킨 듯 보인다. 전시장에는 같은 형태가 반복, 확장되고 또 반영된다. 작가의 말처럼 “대칭적인 요소, 단일 빛, 점의 변형력 등 움직임의 흐름”이 목격된다. 이 공간에서 특정 캐릭터, 기호가 실제로 존재하는지 혹은 작동하는지의 토론은 불가능해진다. 그것은 마치 판타지 소설 속 허구의 장면처럼 그 자체로 의미망을 교란시키고 또 구축하려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이 이미지, 물질들을 착각으로 혹은 상상으로 부르겠지만 그것은 그냥 그렇게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마치 어떤 목적을 위해 소모되길 거부하며, 제공되고 사육되는 존재가 아닌 다른 존재의 가능성을 모색하면서 말이다. 

《Drunkard’s Move: 술고래의 행보》는 분명 수단으로 존재하고 소비되는 등의 합목적적 용도에서 벗어난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지선경의 작업은 이미지의 또 다른 탄생을 의도한다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 그것은 어떤 성패로 논의될 수 있을까. 작가는 도구에게 탄생이 없다는 걸 분명히 인지하는 듯하다. 도구는 만들어지고 사용될 뿐이다. 그것은 수단과 목적으로 파악된다. 지선경의 작업은 이미지의 수단과 목적에 강한 의구심을 드러낸다. 이동하고 흔들리는, 가려지고 소거되는, 반복되고 확장되는 작업은 이미지로 무언가를 명료하게, 뚜렷하게 구분할 수 있다는 믿음을 일종의 오류로 전환시키려 한다. 그리고 이는 미술/전시의 오랜 질문이자 모순을 떠올리게 한다. 토니 스미스(Tony Smith)는 이동의 경험에 빗대어 미술/이미지가 실제를 제한한다고 말했다. “어두운 밤, 먼 곳에 언덕이 있고, 건초더미나 탑, 불길, 갖가지 색의 등이 드문드문 나타날 뿐인 들판에 캄캄한 포장도로만이 뻗어 있었고 어떤 표지나 등도 없었다. 그날의 여행은 무언가를 드러내 보여주는 경험이었다. 길과 대부분의 풍경은 인공적인 것이었으나, 그래도 예술작품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 것이었다. 한편으로, 그것은 예술이 결코 해낼 수 없는 무언가를 해내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몰랐으나, 그 영향으로 인하여 내가 예술에 대하여 가지고 있었던 여러 가지 시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거기에는 예술에서는 어떤 식으로도 표현된 적이 없는 현실이 있는 듯하였다... 나는 스스로 그것이 예술의 종말임이 명백하다고 생각했다.” 

제한된 형식과 내용에서 벗어나려는 미술의 시도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제한된 (전시)공간에 정지된 이미지와 물질로, 특정 행위로 수렴되곤 한다. 그것은 그 자체로 미술의 모순이며 해소 불가능한 욕망을 드러낼 뿐인가. 지선경 개인전《Drunkard’s Move: 술고래의 행보》는 줄곧 ‘도시’ 공간을 ‘이동’의 배경으로 설정한다. 작가의 말처럼 다양한 도시에서 얻은 재료로 도시의 물질과 이미지 기호와 그래픽을 재구성한다. 앙리 르페브르 (Henri  Lefebvre)의 논의처럼 더 이상의 투쟁과 혁명이 불가능한 식민화된 공간/도시에서 그것의 재발견을, 또 다른 생산과 권리의 주장을 시도하는 것은 아닐까. 이 같은 맥락에서 작가의 이미지를 둘러싼 시도의 모순을 읽어보는 것은 어떨까. 전시 제목은 “무작위 분자들이 끊임없이 충돌하는 과정을 나타내는, 임의적인 움직임의 경로를 설명하는 수학 용어”, ‘술고래의 걸음’에서 빌려온 것이다. 작가는 자신이 만들어낸 “허구적 장소를, 실재하지 않지만 다녀온 것으로 상정하고” 제목을 붙였다고 말한다. 앞서 언급한 전시장에서 외부를 열망하는 해결 불가능한 미술의 욕망은 여전히 그 경계를 확장하며 여기저기 구멍을 내고 있다. 누군가는 모순이라 말할 그 작은 구멍에 수단으로 환원되지 않는, 쉽게 소비되지 않는 형상을 비추는 것이 이번 전시가 제안하는 것은 아닐까. 정지된 것의 제시가 아니라 그것을 초월하는 일종의 사건으로서 작품과 전시를 마주하면서 말이다. 

Expanding the holes of contradiction

Hyugue Kwon (Curator of MUSEUMHEAD)

It is ironic to sense the signs of the ‘post-image’ era among images overflowing as if to stifle us. Facing images, we delude ourselves that human beings sense reality and even make decisions about it. Various online media focused on images, such as social media sites connecting the act of obtaining a photograph and the present desire of collection and appropriation, reveal such delusion and its consumerist nature explicitly. Here, some may mention images converted to colonialized consumption or diagnose the current status of deprived images that cannot run properly. It is clear that we are getting insensitive to images. Even those with strong appeals and messages often pass without causing major repercussions. Today, as images of wars, disasters, and pains are consumed listlessly, one imagines, as if in a dream, a scene where images resume contact with the fractured world, regain persuasiveness, and achieve their individual greatness. 

Drunkard’s Move, Ji Sunkyung’s solo exhibition held at the Artist Residency TEMI, appears to try to suspend the desire of images for a while. Suspension here may be an act of partially admitting the loss and impossibility explained above. ‘Suspension’ in this exhibition goes side-by-side  ‘move’ and ‘transfer.’ To walk is also to traverse time and space while continuing to connect with the outside, and to transfer the body, senses, and emotions. Therefore, walking and transferring let us feel that physical and sensitive differentiations are not definite realities but subjects that variably exist according to external conditions and surrounding environments. In spite of concrete substances and outlines, transfers in time, place, and senses generate new connections and collisions and divisions and combinations, while bringing specific objects to question or regenerating them in different contexts. This process is usually associated with the perception of images. Images in the process of transfer bring us to encounter the union between things heterogeneous and hostile as well as parts of the world that sense the incrementality of changes. 

Whereas ‘transfer of suspension’ is contradictory in itself, the artist throws away this irrationality as far as possible, arousing a variety of thoughts at the boundary. This is to recognize that an image is a social outcome, or a place and foundation of disparate acts of producing and utilizing, prohibiting and allowing, dominating and attacking, and so on. Again, the exhibition intends to activate thinking and acting of this complex image along with the concept of ‘transfer’, and not to limit them to specific time-space or hegemony. Cromatopia (2023), which can be seen as the first part of Drunkard’s Move consisting of three parts, approaches viewers as experiences, traces, or premonitions that cannot be put into images. Expressions like premonitions of experiences and traces of events appear as if they are wrong program terms, but the work emerges looking like a kind of nerve cell or broken-up mechanical device that has done away with the superficiality and clarity of an image. The artist creates “a scene emphasizing mobility by using paper scraps from works in numerous different cities.” She mainly composes “forms by creating relationships among unrelated elements through color arrangement,” and in this process, the ways of ‘cutting off,’ ‘coloring,’ and ‘connecting’ especially draw attention. Cromatopia installed on the long wall of the exhibition hall A.1 shows different shapes, sizes, and colors linked with one another and drifting. Here, individual pieces or residues represent their respective transfers and traces in a certain state of having broken away from the concepts of original and duplicate, in different individual ways. The methodologies of cutting off, coloring, and connecting traversing the work reject standardized images and substances and realize a state that has not been fully visualized but seems to transcend the visuality or limitations of existing images. Surely this does not indicate or symbolize specific experiences or impose complex duties by way of multiple space-times. Rather, the work leads us to suppose that its intention may be to test the comprehensive process, beyond general perceptions of association and remembrance as well as their operations, through images. 

The artist’s uncertainties about the inherent operations of images manifest a little more clearly in Emotionsphere (2023) installed in the exhibition hall A.2. Questioning, “Isn’t it possible to interpret a person’s diversified expressions in pluralistic images?,” the artist asked her young nephew to draw a person’s expressions. Afterwards, she projected the personal expressions – drawn like those of an animation character – on thin cloths or added them to objects commonly seen in a city center, such as a manhole cover, for the exhibition. Facial expressions are like particles that give us hints about a person’s conditions. However, they change all the time as if we are walking in the city and sometimes exist in a colorless and odorless state. Facial expressions in the exhibition hall A.2 exist merely as “affectionate flutters” as the artist says, rather than approaching us as mental representation or visual projection of something. Here, images are not fixed but break away from set objects and spread like smells, sounds, or light as faint gestures. If Cromatopia rejects rectangular framed images and their regulations based on the methods of cutting off, coloring, and connecting, Emotionsphere presents the expressions or characters that appear to be clear as small universes fluttering in unknown boundaries and transfers. The context without definite start or ending, which keeps changing its looks in little winds as countless expressions appear and disappear, continues to expose a worldview of unfixed images. 

Flowscapes (2023) displayed in the exhibition hall B approaches viewers as an attempt to expand the illusions of images replacing the explicitness of characters/images. Ji in this process attentively looks at the works of signs and graphics and then stands aside. The reason for being able to figure out the meanings of certain signs or objects may be because they belong to the meaning system. Here, the meaning system embraces not only the explicitness of signs but also that of non-signs. For example, abstract paintings deliver specific emotions and senses through brushworks, colors, and so-called moods. All of our intuitions and feelings form deep relationships with the symbols of most phenomena (including abstraction). What people sense may be merely phenomena that appear, and not the essence. If we erase phenomena that surround us, we may face a situation where the perception, or even the concept of time-space disappears. What will people sense in a space where phenomena have disappeared or become meaningless?  Flowscapes, where familiar signs and notices have been transformed, seems to harbor this question. Identical forms appear repeatedly, expanding and being reflected, in the exhibition hall. In the artist’s words, “flows of transfers, such as symmetrical elements, a single light, and deforming force of dots” are observed. In this space, the discussion on whether certain characters and signs actually exist or operate becomes impossible. This is because it is attempted to disturb and rebuild the semantic network as if in a fictional scene in a fantasy novel. Some people may call these images and substances as delusions or imaginations, but they may be just existing like that, refusing to be consumed for certain purposes and seeking the possibility of being existences other than being offered and raised. 

Drunkard’s Move recalls images that have moved away from the rational functions of existing and being consumed as means. Can we conclude that Ji Sunkyung’s work intends rebirth of images? Can we decide whether she succeeded or failed? The artist seems to clearly understand that there is no birth for tools. Tools are just built and used. They are understood as means and purposes. Ji’s work reveals strong uncertainties about the means and purposes of images. The work that transfers and falters, gets hidden and eradicated, and is repeated and extended tries to convert the belief about being able to differentiate something clearly and distinctly based on images as a kind of error. And this brings back an old question and irony in art/exhibition. Tony Smith said art/image limits reality based on the experience of transfer. “It was a dark night and there were no lights or shoulder markers, lines, railings, or anything at all except the dark pavement moving through the landscape of the flats, rimmed by hills in the distance, but punctuated by stacks, towers, fumes, and colored lights. This drive was a revealing experience. The road and much of the landscape was artificial, and yet it couldn’t be called a work of art. On the other hand, it did something for me that art had never done. At first, I didn’t know what it was, but its effect was to liberate me from many of the views I had had about art. It seemed that there had been a reality there which had not had any expression in art… I thought to myself, it ought to be clear that’s the end of art.” 

  Artistic attempt to get away from limited forms and contents, both in the present and past, has tended to converge on suspended images, substances, and certain actions in limited (exhibition) space. Is this a contradiction of art that reveals insatiable desire? Ji’s solo exhibition Drunkard’s Move continues to set ‘urban’ spaces as backgrounds of ‘transfers.’ As the artist said, she uses materials gathered in various cities to reconstruct signs and graphics for urban substances and images. As Henri Lefebvre argued, isn’t it an attempt at the rediscovery and assertion on other productions and rights in the colonized space/city where struggles and revolution are not possible anymore? In this context, how about reading the contradiction in the artist’s attempts around images? The exhibition title is derived from ‘the drunkard’s walk,’ which is “a mathematical term explaining the process of random molecules continuously bouncing off one another, as well as the path of randomized movements.” The artist said that she came up with the title, “presuming to have visited an unreal, fictional place”  that she made up. The aforementioned insatiable desire of art, longing for the outside from the exhibition hall, is extending its boundary and making holes here and there. Isn’t the exhibition suggesting reflection of shapes that are not reverted to means or easily consumed in the small holes, which may be called contradictions by some people? That is, not the suggestion of something suspended but encounter of the works and the exhibition as an event transcending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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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ee Michael Fried, Art and Objecthood, Chicago, Chicago University Press, 1998

2)  See Henri Lefebvre, translated into Korean by Yang Yeon-ran, Production of Space, ecolivres, 2011. 

 3)Excerpts from the artist’s note written in 2023. 

빛의 그물로 짠 조각들 - 지선경이 그리는 조형미학의 그물코

 

김종길 | 미술평론가

 

#1. 주위를 요구하지 않는 것들에의 ‘깊은 눈’

그는 감각의 다섯 꾸러미(五蘊)에 충실한 예술가다. 불교에서 다섯 꾸러미를 빛(色)․받(受)·꿍(想)·가(行)·알(識)이라 한다.

빛은 몸을 드러낸다. 그래서 몸을 몬바탕(物質)의 상징으로 본다. 나머지 넷은 마음줏대(精神)의 상징이다. 몸의 그물코인 마음은 바깥으로부터 받아 느껴 일으키는 하고픔(受), 받은 느낌이 꿍꿍(想像)과 꿈꿍(夢想)으로 피어서 눈뜸으로 두루 번지는 앎(想), 하는 짓짓이 꼴짓으로 나아가면서 드러내 이루는 움직임(行), 깨어서 몸­마음­세상이 한 그물로 이어져 있음을 알아챔(識)으로 이뤄진다.

그가 다섯 꾸러미에서 가장 재빠르게 느끼는 감각은 몸(色)인 듯하다. 그의 작품들은 다분히 시각적이고 청각적이며, 또 촉각적이기 때문이다.

그의 보고 듣고 맡고 먹고 닿는 몸각(身覺)의 반응들은 아주 예민해서 그것이 사소한 것일지라도 언제나 돌이켜 살폈으리라. 그러니 작업의 시작은 몸각으로 이어지는 수많은 이야기들의 실마리가 아닐까. 그리고 그 실마리는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바람의 이야기로, 곤충들의 이야기로, 달의 이야기로, 집집 우주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예컨대 그것은 낮게 흐르는 바람으로 일렁이는 잔물결일 수 있고, 스치듯 지나가는 어떤 장면들이 먼 기억으로 이어져서 일으키는 아이들의 놀이일 수도 있으며, 때로는 어느 시집에 박힌 시어 하나가 쿵 하고 마음에 박혀서 만들어내는 잔상(殘像)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의 몸각은 늘 열려 있어서 우주와 만나는 ‘깊은 눈’의 안테나에 다름 아닐 터.

몸을 몬(物)으로 보기도 하지만 빛이 없이 몸은 결코 드러나지 않는다. 사실 우리가 보는 거의 모든 것은 빛이 보여주는 헛(幻)의 헛꼴(幻像)일 수도 있다. 그의 작품들이 몬바탕에 얽매이지 않고 여러 가지 아름다운 빛깔(色色)로 드러나는 것은 빛에 홀린(迷惑) 세계의 풍경을 깊게 보기 때문이리라.    

그의 ‘깊은 눈’은 몸각이 아닌 나머지 넷의 마음줏대에서 미학적으로 전환되어 완성된다. 감각의 세계가 몸에서 마음으로 이어질 때 이미지의 껍데기는 단지 하나의 현상으로 남고 그 속의 ‘뜻앎’(意識)이 알아지면서 뜻알계(意識界)가 열리는 것이다. 그래서 거의 모든 작품들은 구체적인 구상이 아닌 추상으로 형상화 되었다.

 

#2. 마음속에서 흐르는 느낌의 조각조각   

그는 사람들에게 거의 주위를 요구하지 않는 것들을 세심하게 관찰한다. 자세히 보고 깊게 살피는 일상의 장면들에서 그는 무언가를 깨닫는다. 그렇게 깨달은 깨달음의 실마리들을 모아서 이야기를 만든다. 그것은 지극히 주관적인 관찰이며 깨달음이고 이야기다. 그에게 먼저 바깥으로부터 받아 느껴 일으키는 하고픔(受)은 바로 그 이야기들의 조각들이다.

그의 작품들이 주로 콜라주 드로잉의 형태로 등장하는 것도 이야기의 조각조각을 이어 붙일 수 있는 가장 적정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몸의 감각을 타고 들어와 마음에 쌓이는 이미지들은 형상을 짓고 일으키는 창조적 불씨와 다르지 않다. 그는 마치 하나의 세계를 조립하듯 피어오르는 이미지들을 오리고 붙이고 떼고 돌리면서 그가 받은 느낌의 꿍꿍(想像)과 꿈꿍(夢想)이 색색의 빛깔로 세워지기를 열망한다. 그래서 그것들은 빛깔의 풍경화 같고, 빛깔의 기념비 같고, 빛깔이 빛깔을 낳고 새로운 빛깔이 되고, 다시 빛깔을 이루는 빛깔들의 세계 같다.

빛깔로 피어서 환한 눈뜸으로 두루 번지는 앎(想)은 그의 마음이 그리는 이 세계의 황홀한 생명들이다. 그의 작품들은 살아 오르는 산숨(生命)의 싱싱한 무늬들로 꾸며진 콜라주 드로잉인데, 달리 보면 그 콜라주 드로잉은 해와 달이요, 크고 큰 숲이며, 나무들이고, 곤충들, 바람, 물, 섬이다. 그는 배역을 캐스팅하듯이 작품을 위한 여러 가지 요소들을 캐스팅한다. 그런 다음 캐스팅한 요소들의 조각들을 하나씩 이어 붙여서 추상적 이미지로 시각화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의 작품들이 전시공간에 설치될 때 그저 작품으로서만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체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빈 공간의 여기저기에 자리를 잡아가면서 작품들은 ‘관람’의 대상을 넘어서서 체험되어지는 상호작용으로 확장된다는 것이다. 공간에서 작품과 관객은 관계를 형성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때 추상적인 이미지는 구체적인 체험의 이미지로 전환된다. 그의 마음이 관객의 마음으로 이어지는 순간일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은 짓고 일으키는 짓짓이 꼴짓으로 나아가면서 드러내 이루는 움직임(行)일 것이다.

그의 작품을 이루는 드로잉의 선들은 움직임이다. 곧장 그은 직선과 구부러진 곡선과 뒤흔들리는 포물선과 지그재그와 액자틀과 잘려나간 선들조차도 다 살아서 이어지고 있으니까. 그러니 화이트 큐브 공간에서 그의 선과 색은 움 솟아 돌아가는 움돌(氣運)이요, 두루두루 살아서 숨 돌리는 산숨이라 할 것이다.

 

#3. 어렴풋하게 떠돌아다니는 사유의 배치

그는 입주 작가 릴레이 프로젝트 영상 인터뷰에서 “콜라주 드로잉을 계속 이어가는 이유는 머릿속이나 마음속에 어렴풋하게 떠돌아다니는 사유나 관념들을 배치하여 그것들의 해상도를 높여가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다섯 꾸러미의 마지막은 정신이 늘 깨어서 몸­마음­세상이 한 그물로 이어져 있음을 알아채는(識) 것이다. 의식과 무의식이 그 안에 있다. 몸의 그물이 마음을 만들고 마음의 그물이 세상을 보는 눈이 된다. 그물의 벼릿줄을 당겨서 콜라주 드로잉을 그릴 때 잡혀 올라오는 이미지들은 그물코에 꿰진 것들이다. 그물의 크기가 아니라 그물코의 크기가 이미지의 크기와 수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가 ‘해상도를 높여가는 과정’이라고 말한 것은 그물코의 크기를 촘촘하게 하겠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들은 20세기 초반의 추상화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렇지만 구상에서 비구상으로 비구상에서 추상으로 넘어가는 이미지의 단순화는 그의 작품과 상관없다. 그의 추상은 이미지의 실존적 뼈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의 이미지는 추상이긴 하지만 아주 구체적인 이야기들을 담고 있어서 추상으로 쓴 현실주의(혹은 추상으로 쓴 주관적 초현실주의)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현실주의든, 주관적 초현실주의든 그가 콜라주 드로잉으로 보여주는 낱낱의 이미지는 색의 무늬이면서 현실의 무늬이다. 이야기의 무늬이고 은유의 무늬이며 생각의 무늬다. 모든 이미지는 현실이라는 이 세계로부터 피어올라 그의 마음에 쌓인 것들이다. 처음엔 어렴풋한 것들이 드로잉으로 소리 내어 말하기 시작하면서(發話) 제 꼴의 목소리를 갖게 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지선경의 작품들은 선명하다. 싱싱하다. 튀어나와서 꿈틀거리고, 퉁겨져 휘감아서 오르내린다. 어딘가에 다다라서 멈추고, 둥글어지다가도 갑자기 날카로워진다. 기지개를 켜듯이 줄곧 당기는 곳에서 익살을 부린다. 달아올랐다가 가라앉고 힘차게 치솟다가 둘레를 쓰다듬는다.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다가 수줍어하듯 내 보이고, 드센 떨림으로 미끈하게 내딛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멈춰있다.

 

2021년 그는 개인전 <BONUS LIFE>의 서문을 대신하는 ‘심해로부터 온 편지’를 공개했다. 그 편지에 인용한 이상의 <최후>는 이렇다.

“사과한알이떨어졌다. 지구는부서질정도로아팠다. 최후, 이미여하한정신도발아하지아니한다.”

 

그리고 편지의 마지막 문단 : “온힘을 다해 파르르 떠는 생의 의지가 갑자기 탈을 바꾸어 공포로 다가온 적은 없는지. 대낮의 먼지를 훔쳐보다 마주친 그 찰나의 표정이 너무도 경이로워 두렵다고 느낀 적은 없는지.”

 

그의 다섯 꾸러미 감각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깊은 눈의 눈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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